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몇 해 뒤 할아버지가 사망하면, 손자녀는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아 할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는다. 이
대습상속은 재산뿐 아니라 할아버지가 남긴 빚까지 함께 넘어온다는 점에서 주의가 필요하다. 할아버지와 왕래가 거의 없었다면 사망 사실조차 늦게 알게 되고, 어느 날 갑자기 채권자의 독촉장을 받고서야 사정을 파악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글은 대습으로 빚을 떠안게 되었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정리한다.
먼저 대습자가 되면 다른 상속인과 똑같은 지위에 선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재산과 빚을 모두 받아들이는 단순승인, 받은 재산 범위 안에서만 빚을 갚는 한정승인, 권리와 의무를 모두 내려놓는 포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아무 조치도 하지 않고 법에서 정한 기간이 지나면 단순승인을 한 것으로 처리되어 고인의 빚을 자기 재산으로 갚아야 할 수 있다.
그 기간이 언제부터 시작되는지가 중요하다. 기간은 고인이 사망한 날이 아니라, 고인의 사망 사실과 자신이 권리를 이어받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안 날부터 진행된다. 할아버지의 사망을 한참 뒤에 알게 되었다면 그때부터 계산하므로, 사망 시점이 오래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선택 기회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언제 알게 되었는지를 입증할 자료를 남겨 두어야 한다.
이미 기간이 지났더라도 구제 수단이 있다. 빚이 재산보다 많다는 사실을 중대한 과실 없이 알지 못하고 기간을 넘겼다면, 그 사실을 안 날부터 다시 법에서 정한 기간 안에 특별한정승인을 신청할 수 있다. 채권자의 소장이나 독촉장을 받고 처음 빚의 존재를 알았다면 그 시점이 기준이 될 수 있으므로 받은 서류의 날짜를 보관해 두는 것이 좋다.
대습자가 미성년자라면 보호 장치가 더 있다. 미성년자일 때는 법정대리인인 부모나 후견인이 대신 선택을 하는데, 대리인이 제때 조치하지 않아 단순승인이 된 경우가 문제였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미성년자였던 사람이 성년이 된 뒤 빚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 특별한정승인을 할 수 있도록 제도가 마련되었다. 성년이 된 뒤 갑자기 채권 추심을 받았다면 이 제도를 먼저 검토해야 한다.
포기를 선택할 때는 그 효과가 어디로 이어지는지 살펴야 한다. 대습자가 포기하면 그 몫은 같은 순위의 다른 상속인, 예컨대 숙부나 고모에게 돌아가거나 경우에 따라 다음 순위로 넘어간다. 가족 전체가 포기할지, 한 사람이 한정승인을 하고 나머지가 포기할지를 미리 의논하지 않으면 친척들에게 예상치 못한 빚이 넘어갈 수 있다.
한정승인을 선택했다면 이후 청산 절차를 밟아야 한다. 정해진 기간 안에 채권자들에게 신고하라는 공고를 하고, 고인이 남긴 재산을 정리해 채권자들에게 순서와 비율에 따라 나누어 갚는다. 이 절차를 소홀히 해 특정 채권자에게만 먼저 갚으면 다른 채권자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질 수 있으므로 절차를 정확히 따라야 한다.
대습자가 고인의 재산에 손을 대는 것은 피해야 한다. 고인 명의의 예금을 찾아 쓰거나 부동산을 처분하면 단순승인을 한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러면 한정승인이나 포기를 할 수 없게 된다. 고인의 재산 현황을 확인하는 조회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결정을 내리기 전에는 재산을 그대로 두는 것이 원칙이다.
빚의 규모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모든 판단의 출발점이다. 행정기관의 통합 조회를 통해 고인 명의의 대출과 카드 채무, 세금 체납 여부를 확인하고, 보증 채무처럼 조회에 잡히지 않는 부담이 있는지도 친척들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할아버지와 오래 떨어져 지냈다면 다른 가족이 아는 정보가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도 한다.
고인에게 재산이 조금 있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도 위험하다. 눈에 보이는 부동산이 있더라도 그 부동산에 대출이 잡혀 있거나 세금이 체납되어 있으면 실제 가치는 거의 남지 않을 수 있다. 재산과 빚의 규모가 비슷하거나 확실하지 않을 때는 한정승인이 가장 안전한 선택인 경우가 많다.
숙부나 고모 같은 다른 가족과의 소통도 필요하다. 이들은 같은 고인의 재산을 함께 물려받는 공동 권리자이므로, 누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서로의 부담이 달라진다. 오래 연락하지 않던 사이라도 이 문제만큼은 정보를 나누는 것이 서로에게 이익이다.
채권자로부터 소송을 당했다면 대응 방법이 따로 있다. 한정승인이나 포기 신고를 마쳤다면 소송에서 그 사실을 주장해야 하고, 판결이 이미 나왔더라도 강제집행 단계에서 다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대습상속을 둘러싼 채무 문제는 기간 계산과 절차 선택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소장을 받았다면 답변 기한을 넘기지 않도록 서둘러 대응해야 한다.
절차를 진행하면서 받은 결정문과 통지서는 모두 보관해 두어야 한다. 시간이 흐른 뒤 채권자가 다시 연락해 오더라도 그 서류 한 장으로 책임이 없음을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핵심은 시간이다. 빚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부터 기간이 흐르기 시작하므로, 독촉장이나 소장을 받았다면 날짜를 기록하고 곧바로 재산과 채무를 조회해 선택지를 정해야 한다.
대습으로 넘어오는 빚은 본인의 잘못과 무관하게 떠안게 되는 부담이다. 제도가 마련해 둔 보호 장치를 제때 활용하면 고인의 빚이 자신의 삶을 무너뜨리는 일을 막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