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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270여 영주, 수도 거주 명령…교통·상업 발달 계기(ip: 115.138.27.41)

  • 맘보숭
  • 2026-05-05
  • 4
마약변호사 그 시대 일본은 달랐다. 이념적으로 중농주의를 고수했지만, 상업의 눈부신 발전을 막지 못했다. 성리학자가 아닌 무사들이 집권했는데, 지방 세력을 견제하려던 정책이 의도치 않게 가져온 결과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전국의 모든 영주에게 격년제로 수도에 거주하라고 명령했다. ‘참근교대(參勤交代)’라 불린 이 제도로 영주 270여 명은 매년 영지에서 에도까지 먼 길을 오가야 했다. 길이 뚫리고 수백 명의 수행원을 재울 숙박 시설도 생겨났다. 육지와 바다에 교통인프라가 완비된 것이다. 영주들은 농민에게서 거둔 쌀을 현금화해 여비와 에도 체류 경비를 마련했다. 화폐 사용이 일상화하고, 어음거래가 생기고, 예금·대출 업무를 하는 환전상들이 나타났다. 인구 100만의 에도뿐 아니라 각 번(藩)의 무사들을 성(城)에 모여 살게 하자 소비도시들이 됐다. 이를 겨냥해 상품 작물 재배가 늘고, 각 지역 특산물들이 브랜드화 돼 전국으로 유통됐다. 유통되는 상품 중에는 각종 서적도 있었다. 17세기 중반에 벌써 출판업자가 200명이 넘었다. 그들은 거액이 들어가는 목판 투자를 위해 동업 조직을 결성하고 해적판을 적발해 관청에 고발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인기 작가에게는 상당한 수익배분을 약속했다. 초기 형태의 지식재산권이 등장한 것이다. 1774년 스기타 겐파쿠가 네덜란드 해부학 책을 번역해 ‘해체신서’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겐파쿠와 동료들은 네덜란드어를 거의 몰랐고 사전도 없었다. 겨우 아는 몇 개의 단어와 그림 속 명사들을 늘어놓고 그 사이를 메워가는 고통스러운 작업을 수년간 반복했다. 신경, 연골, 동맥 등 우리가 쓰는 의학용어들이 다 이때 만들어졌다. 의사로서 직업적 탐구심도 있었겠지만 돈을 벌겠다는 목적을 숨기지 않았다. 출판 1년 전에 ‘해체약도’라는 소책자를 찍어 배포했는데 일종의 홍보 전단지였다. 책으로 돈을 버는 것은 그만큼 독자가 많다는 뜻이다. 당시 서민들에게 책값이 너무 비쌌다. 그래서 책을 빌릴 수 있는 대본소가 전국에서 성업했다. 가장 인기 있는 책은 수위 높은 애정소설이었다. 그런데 이걸 누구에게 읽어달라기가 참 난처했다. 삽화를 보며 상상만 하다 동네 불량배들도 떠듬떠듬 글을 배웠다. 그 결과 19세기 중반 일본의 문자해독률이 80%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