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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은 좋고 사(私)는 나쁘다’는 관념, 경제발전 저해(ip: 115.138.27.41)

  • 릴리리
  • 2026-05-05
  • 4
부산성범죄전문변호사 우리 의식 속에는 조선 500년을 지배해 온 성리학의 관념이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성리학에서 공(公)은 국가의 지배 질서이고, 보편적 윤리 원칙이며, 다수의 공동선이었다. 반면에 사(私)는 지배 질서로부터의 일탈이고, 비윤리적이며, 개인의 이기심일 뿐이다. 퇴계 이황은 서찰집인 ‘자성록’에서 “사사로운 뜻이 싹트기 시작하면, 곧 마음속의 벌레다”라고까지 적었다. 그러한 공사관은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를 유지하는 이념적 토대가 됐다. 특히 상업은 ‘이익만 좇는 탐욕’으로 치부해 억압했다.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자였던 유형원조차 ‘반계수록’에서 상인들은 직접 생산하지 않고 이익을 취한다고 비판했다. “상고(상인)라는 자들은 밭을 갈지 않아도 먹고, 짜지 않아도 입으며, 교묘하게 갑절의 이익을 취해 농민과 공인의 몫을 가로챈다.” 눈에 보이는 상품의 유통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니 지식재산권에 대한 존중은 기대할 수조차 없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18세기 조선 사회를 강타한 베스트셀러였다. 청나라 선진 문물 소개와 조선의 낙후성에 대한 비판은 당대인들의 답답했던 속을 뚫어주었다. 엄격한 고문(古文)을 버리고 시정의 생생한 어투와 해학으로 구성해 술술 읽어가기 편했다. 인간 사회를 돌아보게 하는 ‘호질’ ‘허생전’ 같은 단편소설은 오늘날까지도 읽힌다. 박지원이 연경에서 돌아와 글을 쓰기 시작하자 한편 한편 나올 때마다 한양의 선비들이 앞다퉈 베껴갔다. 전권이 완성되기도 전에 각종 필사본이 나돌았다. 그러나 박지원은 열하일기로 엽전 한 닢 벌지 못했다. 책을 써서 돈을 번다는 생각을 누구도 하지 못했다. 그가 극심한 빈곤에서 벗어난 것은 음서로 벼슬을 얻으면서부터였다. 다시 빈곤한 생활로 돌아갈 자신이 없어서였을까. 박지원은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 명령을 받아들였고, 이후 그의 창의적 저술은 더는 나오지 않았다..